작성일 : 03-06-01 17:03
1985년에 방송된 라디오 자서전 내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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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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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상업라디오 방송 인터뷰 - 1985년 哥哥가 자신에 관한 것들을 직접 얘기한 프로그램입니다.
6부 - 연예계진출
아주가창대회참가
중국어를 배우는 건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난 항상 중국어에 더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한 학교에서 1년 정도를 공부했고, 여러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동창들은 民歌 같은 음악들을 좋아했는데, 그 때 한 기회로 인해 난 가창대회에 참가했고, 이 대회가 나를 연예계로 진출하게끔 해주었다. 연예계에 진출한 건 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5월에 나와 한 동창친구녀석은 친구들과 民歌그룹을 결성했는데, 그때 난 밴드내
에서 보컬을 맡았고, 여러 대회에 참석할걸 대비해서 우리들은 ONYX라는 밴드이름을 지었다. ONYX는 아주 특이한 돌의 일종인데, 빛이 날 정도로 검은 색깔을 가진 돌이었다.(*이 부분은 石(돌)로도 나와있는것도 있고, 蛇(뱀)으로도 나와있는것도 있네요. 알아본결과, 돌이 맞다는...) 이 밴드로 몇 개의 가창대회에 참가했었는데, 우리는 2등도 하고, 3등도 했지만, 1등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
그 후에 RTV에서 주최한 아주가창대회에 참가했는데, 같이 등록한 친구는 예선도 진출하지 못했지만, 난 한번에 결승까지 진출하고 말았다. 운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콩지역 결선에서 난 2등을 했고, 아주가창대회 총결승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총결승에는 8개 국가가 참가했는데, 그 때 점수를 매길 때 필리핀심사위원단의 점수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나와 필리핀대표가 1등을 가지고 아주 치열하게 경합을 벌일 때, 마지막 점수를 주는 과정에서 필리핀심사위원이 나에게 가장 낮은 점수인 77점을 주고, 우리 홍콩심사위원은 필리핀대표에게 93점을 주었다. 결국 점수차이는 많이 벌어졌고, 총결승에서 난 5등을 하고 말았다. 그 필리핀대표는 1등을 거머쥐었고 말이다. 사실 이 필리핀 친구는 여러분들이 당시 음악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거나 그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다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그 해의 1등이었다. 하지만, 그 해의 1등은 나에게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했다.
RTV와 Polygram과의 계약
그 1등은 아마도 하나의 역선전이 되었는지, 난 하룻밤사이에 유명해진 기분 같은걸 느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튿날, 종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는 나와 계약을 체결하자고 했다. 그 계약은 내가 RTV에서 종합프로그램을 맡을 것이며, 월급은 1000달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를 얘기하자면, 난 정말로 독립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1000달러라는 돈이 많던 적던 간에 나에게는 유혹적이었고, 바로 3년짜리 계약에 싸인을 했다.
이 3년 동안, 사실 난 구속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난 집을 벗어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영국에 있을 때 오랫동안 혼자 생활한 것에 익숙해져서, 난 가족들과 생활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래서, 난 廣播道에 월세 오백달러짜리 방을 하나 빌렸다. 여러분들이 장국영이 남은 오백달러를 어떻게 사용했을까?라고 묻지 않을까 싶다. 당시 RTV의 식당은 내 식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몇천달러를 빌려서 그 집에 필요한 가구들을 사서 그곳에 들어간 후에, 매월 백달러씩 갚아나갔다. 그러면, 내 수중에 한 달에 남은 돈은 구백달러였지만, 절약해서 저축까지 했었다.
하지만, 데뷔하고 난 후의 나에 대한 반응은 이상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행운이라고 생각한것은 대회에 참가하자마자 폴리그램음반사와 계약을 맺은 것인데,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 진미령이 아닌 다른 진미령과 함께, 폴리그램에서 녹음을 했었다.
폴리그램은 그때 나에게 한 장의 음반을 내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내 곡으로 만들어진 앨범이 아닌, 외국 곡들로 채워진 앨범이었다. "I like dreaming"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독일계 영국인인 프로듀서와 내가 함께 녹음한 곡으로, 이 곡을 발표했을 때 반응은 좋지 않고,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 많은 평론가들이 나의 노래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등의 평가를 내렸는데, 대부분이 악평이었다.
77년 당시에는 온나와 아샘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참석한 쇼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몇천명의 사람들로부터 야유를 받은 때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무대에서 실망한 일과 첫번째 영화
사람들한테 야유를 받은 처음 느낌은 "와, 왜 이렇지, 내가 왜 사람들한테 야유를 받아야 하는거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였다. 난 붉은색 티셔츠와 흰색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 관중들은 나에게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라고 외쳤었다. 그때가 가창대회에 참가한 후 처음으로 참석한 공식 무대였다.
그러한 참혹한 나날동안 죽고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히 일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기억으론 나의 음악활동은 시작부터 저조했는데, 후에 한 영화사가 나에게 영화출연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첫번째 영화작품 실수의 시작이었다.
그 첫번째 영화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상했다. 그 영화사는 그 때 아주 이름난 회사였는데,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했다. 그와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홍루몽식의 코믹영화 한편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난 누가 여주인공이냐고 물었고, 그는 황행수라고 답했는데, 난 "와~황행수가 나랑 같이 영화에 출연한다고?"고 생각했고, 당연히 아주 기뻤다. 더욱이 유명배우와 첫 영화를 찍는다면, 그 결과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이 영화는 정말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보수는 겨우 6500달러였지만, 나한테는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6500달러는 내가 처음으로 받는 가장 높은 보수였다. 그래서, 난 하기로 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며칠을 촬영하다 보니, 모든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이 영화는 코믹한 홍루몽에 야한 요소를 넣은 영화였는데, 난 촬영을 하면서 그 영화관계자들이 정말로 무지막지한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건, 어느날 장국영이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맞더라도 왜 맞는지 알지도 못하고 맞을 것 이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던 것이다. 이런 울분을 참으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나온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심지어는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개봉이 금지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난 그 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말 운이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원래 이 영화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내 첫번째 영화이자, 처음으로 사람들한테 욕을 먹은 영화였다. 그 후에, 얼마간은 난 다시는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TV드라마에 출연
유일하게 RTV의 종합프로그램에서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여전히 반응은 냉담했으며, 결국에는 개성이 없다는 이유로, 난 이 프로그램과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아무일 없이 3개월을 보내야만 했다...
한 드라마에서 나에게 연기소질이 있다고 생각하곤 캐스팅제의가 들어왔는데, 드라마팀에 들어갈 의향이 있냐고 물어왔다. 그 땐,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드라마팀에 들어갔고, 이전보다 훨씬 좋은 반응의 몇 편의 청춘드라마에 출연했는데,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라문씨의 소개로 한 매니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라문의 전매니저이자 나의 이전 매니저였다.
이 때 난 진백강을 알게 되었고, 그 때 당시 연예계관계자들은 청춘우상영화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서, 나와 진백강 역시 2편의 영화에 같이 출연했는데, 그 영화가 《갈채》와 《실업생》으로, 난 악역을 맡았었다. 그 당시의 여자애들이 순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관객들은 악역을 맡은 배우는 그 사람 자체도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쪽으로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아무도 나에게 음반을 내자고 제의하지 않았다.
하루는, 폴리그램음반사에 갔더니 폴리그램의 담당자였던 Mr,풍이 나와의 계약기간이 다 만료됐다면서, 계약대로 이미 영어앨범1장과 중국어앨범1장을 포함해서 2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 재계약의 의사가 없다면서 당신 뜻대로 다른 음반사를 알아보라고 통보했다.
당시에 난 정말 우울했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아, 한동안 많은 친구들이 내가 여전히 폴리그램에 소속되어 있는 줄 알고 있었고, 그 후 비로소 그들에게 내가 더 이상 폴리그램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이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난 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 이 라디오자서전에서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 가족
(어린시절, 六姐, 외할머니의 죽음, 아버지, 수영에 관한 재미있었던 일, 일곱째 형과 여덟째 형)
2부 - 학창시절:초등학교
(나의 가장 좋은 "친구들", 聖路琦초등학교(St. Luke Primary School), 큰 누나 장록평은 아주 엄했다, 초등학교때 있었던 재미있던 일)
3부 - 학창시절:중고등학교
(매괴崗중고등학교(Rosary Hill Secondary School), 적응기,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영화)
4부 - 연애사
(초등학교시절 연애사,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1),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2))
5부 - 학창시절:영국유학시절
(영국으로의 유학, 학교에서의 첫 느낌, 아침식사, 점심식사와 체육수업, 저녁식사,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다, 지리과선생님, Leeds대학교와 홍콩으로의 귀국)
6부 - 연예계진출
(아주가창대회참가, RTV와 Polygram과의 계약, 처음으로 무대에서 실망한 일과 첫번째 영화, TV드라마에 출연, 새로운 도전, 싱가포르와 태국에서의 콘서트, 《영몽가락》를 찍을 때 있었던 잊을수 없는 경험, 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7부 - 진백강
(1978년에 진백강을 알게 되었다, 진백강과의 우정, 진백강과의 사업관계, 진백강은 나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치 않았다.)
8부 - 사업상의 전환점
(처음 진숙분을 만나다, MONICA와 화성음반사, 진숙분과 여소전)
9부 -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여성
(첫번째 여성은 "六姐"이다, "六姐"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대모님, 매염방을 위해 해명하다, 매염방은 의리가 있다.)
10부 - 앞으로의 계획
(콘서트에 대한 약속,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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