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3-06-07 23:51
1985년에 방송된 라디오 자서전 내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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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상업라디오 방송 인터뷰 - 1985년 哥哥가 자신에 관한 것들을 직접 얘기한 프로그램입니다.
5부 - 학창시절(영국유학시절)

영국으로의 유학
영국으로 떠날 때, 이상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바로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 六姐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날 배웅해 준 것이었다. 그 때, 들었던 느낌은 "날 빨리 떠나게 해줘, 홍콩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였다. 아마, 어린시절의 영향탓이었는지, 난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난 그 때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서 작별인사를 한 후에, 바로 뒤를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났는데, 아쉬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비행기에 올라탄 후에는 재미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탔던 비행기는 "Laker"라는 기종이었는데, 지금 홍콩에 아직 이 기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에는 학생전용으로 타는 비행기는, 가격이 아주 싸서 왕복은 1천달러정도면 살 수 있었고, 편도는 몇백달러면 영국까지 가는 표를 살 수 있었다. 또, 중간에 경유하는 곳도 많지 않았는데, 내가 탔던 비행기는 인도에 한번 경유하고 바로 영국까지 갔다.
처음으로 탄 비행기가 점보기라서 아주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앉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하. 여러분들도 비행기를 타봤으면 알겠지만, 기내에는 영화를 틀어주는 스크린이 놓여져 있어서, 기내 천장에는 영사기가 매달려 있었다. 점보기에는 중간마다 그 영사기가 놓여져 있었는데, 난 바로 그 영사기 밑에 앉게 되었다. 비행 중에 갑자기 위에 매달려있던 영사기가 밑으로 떨어졌고, 비행기가 안정된 고도로 접어들어서야 승무원들이 비켜달라고 하면서 영사기를 수리했다. 이렇게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 와보니, 이 곳의 날씨는 홍콩과 완전히 달랐다. 그때가 8월말경이었는데, 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격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8월초에 영국에 가서 친척집에 머물렀는데, 난 영국에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늦게 출발했다. 그곳에서 한 분이 마중을 나왔고, 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에 학교로 갔다.
학교(Eccles Hall School)에서의 첫 느낌
이렇게 멀리 떠나온 것이 처음이라서, 난 28시간을 내리 잤다. 그곳에 도착한 후에는 정말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차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하루를 넘게 잤더니, 나를 배웅나와 준 분의 아들이 날 깨웠다. 그는 "장국영, 학교 가야지."하면서 날 깨우고는, 날 학교까지 바래다주었다.
학교는 정말 크고 좋았다. 난 무슨 명문학교출신도 아니고, 요구가 많거나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이 왜 이렇게 작냐는 등의 불평은 하지 않았다. 또, 영국학교들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컸다.
학교에 도착한 후에 보니, 그곳에는 한 분의 선생님과 그분의 사모님을 제외하고는 한명도 없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샌드위치를 준비해줬다. 이튿날에야 학생들이 돌아왔고, 난 16명이 함께 묵는 기숙사방에 배정되었다.
내가 영국에 막 도착했을 때, 난 유아반이 아닌 Junior반에 배정되었다. 홍콩에서 중학교2학년까지 공부하다가 왔는데,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어서 홍콩의 고등학교1학년과정에 해당하는 학년에 배정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비교적 어떤 환경에서든지 잘 적응하고, 어떤 힘든 일도 잘 견뎌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의 생활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선박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를 둔 나와 같이 그곳으로 유학 갔던 친구는 자라온 가정환경때문인지 비교적 까다로운 편이었다. 난 그곳에서 전혀 야위지 않고, 오히려 살이 쪘다. 그 이유는 그 애가 아버지한테 항의의 의미로 단식을 해서, 자신이 먹을 것까지 나에게 줬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먹을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의 식단은 어땠는지 여러분께 알려주겠다.
아침식사
아침 7시에 모닝콜이 있었는데, 그 소위 모닝콜이라고 하는 것이 호텔에서의 모닝콜처럼 몇 시에 깨워달라고 하면 직접 깨워주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7시에 경보기가 울리는 것처럼 한차례 벨이 울리면, 바로 일어나서 직접 침대보를 정리하고 옷을 입은 후에, 약 10여분을 걸어서 식당이 있는 메인기숙사로 간다. 학교교장선생님도 그 메인기숙사에서 살고 계셨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고, 7시 반부터 아침식사를 시작하는데,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아침식사에는 정말 많은 음식들이 나왔다. 아침식사에는 피시앤칩, 우유, 빵에다가 2개의 달걀까지 나왔는데, 그 달걀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계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었다.
점심식사와 체육수업
12시가 되면, 우리는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는 홍콩에서의 점심과는 달랐다. 대부분이 고기류였는데, 음료는 우유대신 물을 마셨고, 디저트를 먹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바로 수업이 이어졌다.
3시부터 체육수업이 이루어졌다. 그때 했던 운동은 지금 이만큼 성장할 수 있게끔 해준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영국에 있을 때는 교육을 타이트하게 시키는 때라서, 체육수업은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해야 했는데, 난 이 두 가지를 다했었다. 하지만, 농구는 처음에 한번 해보고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동창들은 14살 정도였는데, 다들 농구를 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키가 아주 커서, 그 애들하고 몇 번 부딪히고 나서는 우리 몇 명은 따로 조를 짜서 축구를 하러 갔다. 축구를 할 때는 골대 앞까지 가지는 못했는데, 골키퍼들이 워낙 덩치가 좋아서, 난 그냥 옆에서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정도였다.
나와 같이 간 그 홍콩친구는 운동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 애는 아버지한테 그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다고 편지를 써달라고 해서, 그 애는 체육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중국인이 그 애와 나 두 명뿐이어서, 내가 유일하게 영국 애들하고 함께 운동을 한 중국인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참으로 빨리 갔는데, 영국에서의 생활은 정말 무료했다. 토요일이 가장 즐거운 날이라면, 그건 영국 친구들에게나 해당되었다. 왜냐하면, 토요일에는 외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토요일에 외출을 할 수 있냐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리들은 쉬는 날 없이 하루종일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홍콩 친구들처럼 마음대로 놀 수가 않았다. 우리는 방학을 해야지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학교근처에 사는 친구들만 집에서 통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30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기숙생활을 해야만 했다.
오후3시부터 체육수업을 받고 5시가 되면 전부 도서관으로 가서 복습을 해야만 했다. 2명의 선생님이 돌아다니시면서 우리를 감독을 하셨는데, 공부를 하든지, 그림을 그리든, 놀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8시까지 그곳에서 있다가, 또 종이 울리면 우리는 그제서야 메인기숙사로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는 우유와 2개의 비스킷이 전부였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밤들을 보냈다.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다.
만일 여러분들이 盧葉眉와 같은 몸매의 소유자라면, 반드시 외국으로 유학을 가길 바란다.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다이어트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유학을 떠난 친구들 대부분은 음식이 맞질 않아서 고생하는데, 대부분 집에 편지를 써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렇게 하면, 가족들이 용돈이나 우리의 배를 채워줄 라면 같은 식료품을 보내줬다.
우리 기숙사에는 종종 물건을 도둑맞는 일이 발생했는데, 내 침대 옆에는 자주 쓰는 물건을 놓아두는 작은 서랍이 있었는데, 2회에 걸쳐서 2개의 라면을 도둑맞았었다. 그 후에 우리는 지리선생님한테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는데, 지리선생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는 그분의 주방을 우리가 쓸 수 있게끔 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방을 빌려 쓰기 전에는 어떻게 라면을 끓여먹었을까? 바로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에 우리기숙사에는 뜨거운 물과 찬 물이 나오는 수도관이 있었는데, 수도관을 열어놓고 한 5분이 지나면, 물이 조금씩 끓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라면봉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라면을 꺼내고, 라면 봉지를 아주 평평한 종이를 자르듯이 조심스럽게 잘라낸다. 또, 테이프를 이용해서 그 봉지를 그릇처럼 만들어서, 그 곳에다 라면과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부어놓는다. 그런 후에, 종이로 그 위를 잘 덮어놓고, 손으로 누르고 약 3분 정도가 지나도 라면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한 15분이 지나면, 그나마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건 그 당시에 아주 괜찮은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땐 정말 먹을게 없었다. 저녁식사는 음료수 1잔과 비스킷 2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지리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방을 쓸 수 있게 해주셨다.
지리과 선생님
이 지리선생님에 대해 얘기하자면, 정말 그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역사나, 영국문학 수업에는 실습이 없었는데, 외국에서 공부를 했던 친구들은 잘 알겠지만, 지리시간에는 실습여행을 자주 간다.
그 여행은 "Full Trip"이라는 건데, 우리 학교는 Norwich에 있어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Leeds에 가는 기차를 탔었다. Leeds는 스코틀랜드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많은 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영국은 워낙 평평한 지역이라서 평소에 산 같은 건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 가서야, 폭포와 산과 같은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때 홍콩으로 돌아와 방학을 보내면서 "14女英豪"라는걸 본 기억이 난다.
Leeds대학교와 홍콩으로의 귀국
"14 女英豪"은 何利利, 李靑, 李麗華 같은 당시의 유명한 여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내 기억으로 그때 Norwich를 올라가면, 한 YMCA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부터 낮에는 그곳에 가서 지리와 관련된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여러 풍경들을 보았는데, 그 산의 형세가 내가 말한 "14女英豪"의 여장군이 올랐던 산처럼 곧고 위험해보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곳을 피해서 갔는데, 딱 한번 위험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내가 가던 길 위쪽에는 절벽이 있어서, 우리가 그 밑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뭔가가 떨어졌는데, 바로 산양이었다.
이정도면 유학시절 얘기는 어느 정도 다 한 건가? 아직 조금 더 남아있다. 내 유학시절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난 약 5년 반에 걸쳐서 고등학교 1학년과정부터 가장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서 장학금까지 받았고, Leeds대학 Textiles&Design과에 합격했다. 난 그 대학에서 1년 남짓 공부를 했다. 사실…
지금 스튜디오밖에서 胡啓榮이 내가 한 말을 듣고는 웃고 있다. 내가 백설공주처럼, 그곳에서 바느질을 했냐면서 말이다. 사실 그 과에서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다. 미술디자인 같은 것도 배워야 했고,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것들에 대한 흥미가 있었다. 내가 계속해서 그 쪽 공부를 해나갔다면, 지금쯤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좋은 시절이 계속 되는 법은 없는 듯, 1년 남짓 공부한 시점에서, 어느날 홍콩에서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편지 한 통이 날라왔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듯이 나이가 들으신 어르신들은 자신의 몸이 안 좋아지면, 곧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홍콩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쓰신 것이다.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아주 따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걸 원치 않으셨는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막내아들이 곁에서 지켜봐 주기를 바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 홍콩으로 돌아왔고, 그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그 때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양복점에서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한 학교에 편입해 공부를 하길 원했고, 편입생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때도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내가 홍콩으로 돌아왔을 때, 내 영어실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때의 사립영어학교의 영어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교장선생님은 농담조로 "네 영어수준이면 중2, 3학년정도는 가르칠 수 있다, 그러니, 넌 공부를 하는 것보다 가르치는게 낫을 듯 싶은데."라고 말씀 하셨다. 뭐 그건 교장선생님의 농담일뿐이고, 난 끝까지 고2과정에 편입하기를 고집했다. 왜냐하면, 사실 내 수준이 고2과정보다는 높았지만, 내 중국어수준은 그들보다 한참 떨어진 편이였기 때문이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후에는 난 중국어공부에 치중했다.
* 이 라디오자서전에서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 가족
(어린시절, 六姐, 외할머니의 죽음, 아버지, 수영에 관한 재미있었던 일, 일곱째 형과 여덟째 형)
2부 - 학창시절:초등학교
(나의 가장 좋은 "친구들", 聖路琦초등학교(St. Luke Primary School), 큰 누나 장록평은 아주 엄했다, 초등학교때 있었던 재미있던 일)
3부 - 학창시절:중고등학교
(매괴崗중고등학교(Rosary Hill Secondary School), 적응기,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영화)
4부 - 연애사
(초등학교시절 연애사,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1),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2))
5부 - 학창시절:영국유학시절
(영국으로의 유학, 학교에서의 첫 느낌, 아침식사, 점심식사와 체육수업, 저녁식사,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다, 지리과선생님, Leeds대학교와 홍콩으로의 귀국)
6부 - 연예계진출
(아주가창대회참가, RTV와 Polygram과의 계약, 처음으로 무대에서 실망한 일과 첫번째 영화, TV드라마에 출연, 새로운 도전, 싱가포르와 태국에서의 콘서트, 《영몽가락》를 찍을 때 있었던 잊을수 없는 경험, 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7부 - 진백강
(1978년에 진백강을 알게 되었다, 진백강과의 우정, 진백강과의 사업관계, 진백강은 나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치 않았다.)
8부 - 사업상의 전환점
(처음 진숙분을 만나다, MONICA와 화성음반사, 진숙분과 여소전)
9부 -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여성
(첫번째 여성은 "六姐"이다, "六姐"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대모님, 매염방을 위해 해명하다, 매염방은 의리가 있다.)
10부 - 앞으로의 계획
(콘서트에 대한 약속,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 나의 소원)
* 당신이 너무나도 보고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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