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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22 01:13
1985년에 방송된 라디오 자서전 내용(8)
 글쓴이 : 1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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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상업라디오 방송 인터뷰 - 1985년 哥哥가 자신에 관한 것들을 직접 얘기한 프로그램입니다.

7부 - 진백강



1978년에 진백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 음반사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기로 한 이상, 난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모두 사실이며, 거짓은 없다. 만일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면, 날 이런 방송에 부를 필요는 없다.

79년에 난 진백강을 알게 되었다. 아, 아니다. 78년이다. 78년에 RTV의 종합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장미연과 같이 "Bang Bang레스토랑"이라는 곳에 갔다. 이 레스토랑은 지금은 이미 문을 닫았는데, Hyatt Hotel뒷편에 있었다. 여러분들이 침사쵸이부근의 지리를 잘 안다면, Pumb레스토랑을 잘 알고 있을텐데, 바로 그 부근이다. 난 그곳에서 장미연, 송호휘와 함께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우리곁으로 오더니, "어떤 사람이 저보고 당신하고 많이 닮았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했다. 난 놀라서, "누구시죠?"라고 물었고, 그는 "전 대니라고 해요."라고 답했다. 그 날이 내가 대니를 처음 만날 날이었는데, 그가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진백강이다.

진백강과의 우정



그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그는 한 작곡대회에 참가해 3등을 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TVB의 오락프로그램에서 팝송을 불렀다. 나 역시 RTV에 있을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불렀었다. 어떤 때는 그는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 만나러 오기도 했다. 나 역시 별 사심 없이,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지내고 나서, 한번은 엽려의, 엽진당 그리고 진백강과 함께 마카오에 있는 "公敎극장"에서 소형콘서트를 연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난 진백강이 아주 돈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는 아주 비싼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가죽가방하며, 반지, 목걸이 등이 다 유명상표의 제품이었다. 난 그때 당시에 그의 그런 모습에도 다 익숙해져서, 함께 외출을 하곤 했었다.

그는 나에게 어떤 노래를 들려줬는데, 그 곡을 듣고 나서 "너의 신곡이니?"라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난 그 노래에서 그 전화부분이 젤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 곡이 바로 여러분들이 다 알고있는 그의 "眼漏爲Ni流"라는 곡이다.

이런 단계가 지나고, 아, 사실 아직 다 지나간 건 아니다. 그날 오후에 우리가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가 나에게 그 노래를 들려준 건 마카오로 가는 배위에서였다. 그 후에, 방송국에서 나와 엽려의, 엽진당을 인터뷰했는데, 아무도 진백강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이 바로 진백강이에요, TVB오락프로그램에서 본적이 있을텐데요. 그하고도 인터뷰를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그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은 그다지 그하고 인터뷰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백강은 "眼漏爲Ni流"라는 곡을 내놓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다.

진백강과의 업무관계



그는 한 매니저를 두게 되었는데, 그의 매니저는 나중에 나를 도와 매니저 일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난 그와 2편의 영화를 찍었다. 첫번째 영화는 바로 《喝彩》였는데, 그는 주인공을 맡고, 난 악역을 맡았다. 그는 "喝彩"라는 곡을 발표했고, 많은 이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난 대중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영화사들에게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력이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사에서 《失業生》을 찍자고 했을 때, 나와 함께 출연하는 것을 거절했다. 《豆芽夢》를 찍은 감독 곽耀良은 날 캐스팅하기를 고집했고, 결국엔 그가 나와 출연하기를 원치않는 상황에서 같이 출연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날 좋게 봐줬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그는 날 능가했고, 이런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우리사이는 서먹해졌고,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더라고 피하고, 어떤 때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런 나날들은 鍾保羅가 드라마를 찍는 도중에 차에 치는 사고가 발생됐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내가 제일 먼저 그를 도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게 해주었다. 그 때, 우리 매니저는 돈을 벌 생각에, 그의 발을 치료할 돈을 모금할 콘서트를 계획했다. 그 무대에 진백강과 같이 출연하게 되었는데, 난 오프닝을 장식하고 그는 엔딩을 장식했다.

그때 난 우리가 명예와 이익 양 측면에서 너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는 그와 어떤 식으로도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失業生》시사회장에서, 난 기자들에게 "난 다시는 진백강과 영화에서든 음악에서든 다시는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이렇게 쉽게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가보다, 올해에 난 《聖誕快樂》에서 다시 그와 함께 출연했다.

진백강은 나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후에, 그와 난 한 오락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게 되었다. 난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와 다시는 경쟁할 필요도 없고, 그와 다시는 비교 당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최근 1~2년 사이에 그와 나의 음악적인 방향은 달라졌다… 거리감이 생겼다기보다는, 음악적인 방향과 이미지면에서 그와 나는 달랐다. 난 다시는 그와 비교를 할 수 없다.

이젠 나와 그를 비교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건 그와 나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오랫동안 똑같은 사람하고 비교를 당하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남들보다 뒤쳐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금 뭔가와 비교를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비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은, 어떤 한 스타와 나를 비교하지 말고, 정말로 날 위해서 비교를 하길 원한다면, 어제의 장국영과 오늘의 장국영을 가지고 비교해 주길 바란다.

8부 - 사업상의 전환점



처음 진숙분을 만나다.



그 당시에 난 돈 문제로 인해 이전의 매니저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난 그가 돈문제에 있어서 그다지 분명치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약간의 사기성이 없지 않아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그와 도리를 얘기해도 그는 내가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돌려주기를 거절해서, 소송까지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왜 양쪽 다 돈을 못 받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다.

이러는 동안, 난 양권이라는 감독을 알게 되었다. 양권은 나와 《鼓手》라는 영화를 찍은 감독인데, 그는 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고, 내 인생에 있어서 사업상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 회사를 소개해줬다. 양권감독은 《鼓手》에 많은 음악들을 삽입할려고 했는데, 내가 매니저와의 불쾌한 일로 인해 그 곡들을 녹음하지 못하게 될까봐, 자기가 알고 있던 한 음반사의 사장을 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화성음반사의 진숙분이다.

그 때 진숙분과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얼마의 개런티가 필요한지 물었다. 난 개런티는 이미 나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내게 필요한 것은 그 곡들을 녹음해서 발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2년의 계약을 맺고, 2년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걸 다하겠다는 심정으로 화성음반사와 계약을 했다. 당시에 받은 개런티 역시 많고 적음을 얘기할 수 없다. 때마침, 여소전을 알게 되었다.

MONICA와 화성음반사



여소전은 내가 RTV에 있었을 때부터 알게 된 좋은 친구이고, 외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의 의붓아버지와도 같은 친구인데, 그는 내가 화성음반사에서 처음 발표한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화성음반사의 이점은, 많은 일본곡들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런 판권문제는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난 몇 곡의 일본곡을 써보기로 했다.

여러분들이 막 익숙해지기 시작했거나 이미 익숙한 "풍계속취"가 이번 내 화성에서의 첫번째 앨범에 실린 곡이기도 하다. 앨범을 막 내놓았을 때는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조금은 안 좋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나빴다.

DJ들에게 이 앨범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들은 괜찮은거 같다고만 이야기할 뿐, 진심으로 이 곡을 추천해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 곡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서인지, 이 곡을 신청하는 친구들이 점점 더 많아서였는지, 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때 난 TVB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로서 TVB의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난 경가금곡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당시에 난 경가금곡에서 찍은 뮤직비디오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일편치」와 「MONICA」와 「위니종정」을 발표했다. 모두 화성에서 발표한 음반들이다.

「MONICA」를 녹음하게 된 사연도 기가 막힌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MONICA」를 부르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내 기억으론 83년에 도쿄음악제에 소호대를 보러 갔었다. 소호대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난 吉村方司라는 신인을 보게 되었는데, 이 신인가수는 「MONICA」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가수는 당시에 일본과 홍콩에서 유명하지 않았는데, 난 그의 무대에 빠져들었고, 그의 노래에 흥미가 생겼다.

나와 여소전은 도쿄음악제에서 이 가수의 무대를 본 후에, 이 곡을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홍콩으로 돌아와 앨범을 준비하면서, 이 곡의 판권을 따와, 팬들의 환영을 받았다.

후에 발표한 「위니종정」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진숙분과 여소전



대기업의 관계는 아주 복잡하다. 하지만, 난 화성에 들어간 후에, 밖에서 듣던 만큼 대기업이 복잡하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적어도 모든 일에 대해선 다들 화목했다. 물론, 의견의 충돌도 있었으나, 그러한 충돌은 연예인을 위해서 좋은 것이었다.

나를 가장 잘 도와준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진숙분이다. 진숙분은 앨범을 낼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번 위니종정 앨범을 위해서, 그녀는 내가 바로 일본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그녀는 정말 나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앨범작업을 하면서 나의 친구가 된 여소전이다. 사실 난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아주 많다. 여소전은... 난 일반 관중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데, 아마도 대부분은 그가 부인을 때리는 아주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사람이다. 내 말 뜻은 그가 일을 함에 있어 아주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일을 함에 있어 비교적 보수적인 사람인데, 곡을 녹음할 때 그는 그다지 많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적인 영감에 있어서 그는 정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천성적으로 음악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밴드출신인걸 모른다. 그의 어린시절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어렸을 때 영화를 찍고, 아주 재능 있는 어린 스타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소문들이 불어났기 때문에, 그가 지금 화성음반사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음악적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난 그를 매우 존경한다. 그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등불과도 같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는데, 그가 나를 위해 해준 일들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예를 들면, 그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 같은 거 말이다. "소녀심사"의 피아노반주는 그가 직접 해 준 것이다. 이런 일들은 프로듀서가 굳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그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해주었다. 난 그에게 정말 감사한다.

또, 축하파티장에서 소전은 내 앨범이 너무 잘 팔린다며 나를 위해 울고 말았다. 난 그전까지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안지 8년이 되었지만, 정말이다. 그와 관복영(부인)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심지어는 별거다 이혼이다 등의 말이 오고갔지만, 그는 한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그는 감격해서 눈물을 보였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는데, 내가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 이 라디오자서전에서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 가족
(어린시절, 六姐, 외할머니의 죽음, 아버지, 수영에 관한 재미있었던 일, 일곱째 형과 여덟째 형)

2부 - 학창시절:초등학교
(나의 가장 좋은 "친구들", 聖路琦초등학교(St. Luke Primary School), 큰 누나 장록평은 아주 엄했다, 초등학교때 있었던 재미있던 일)

3부 - 학창시절:중고등학교
(매괴崗중고등학교(Rosary Hill Secondary School), 적응기,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영화)

4부 - 연애사
(초등학교시절 연애사,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1), 중고등학교시절 연애사(2))

5부 - 학창시절:영국유학시절
(영국으로의 유학, 학교에서의 첫 느낌, 아침식사, 점심식사와 체육수업, 저녁식사,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다, 지리과선생님, Leeds대학교와 홍콩으로의 귀국)

6부 - 연예계진출
(아주가창대회참가, RTV와 Polygram과의 계약, 처음으로 무대에서 실망한 일과 첫번째 영화, TV드라마에 출연, 새로운 도전, 싱가포르와 태국에서의 콘서트, 《영몽가락》를 찍을 때 있었던 잊을수 없는 경험, 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7부 - 진백강
(1978년에 진백강을 알게 되었다, 진백강과의 우정, 진백강과의 사업관계, 진백강은 나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치 않았다.)

8부 - 사업상의 전환점
(처음 진숙분을 만나다, MONICA와 화성음반사, 진숙분과 여소전)


9부 -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여성
(첫번째 여성은 "六姐"이다, "六姐"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대모님, 매염방을 위해 해명하다, 매염방은 의리가 있다.)

10부 - 앞으로의 계획
(콘서트에 대한 약속,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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