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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1-09 23:46
CUT - November 2004 No.172
 글쓴이 : 12956
조회 : 4,512  

CUT November 2004 No.172



2004년 11월 일본에서 발행된 CUT 잡지에는 ASIAN MOVIE BEST 20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선정된 총 20편의 영화에는 哥哥의 《패왕별희(3위)》와 《춘광사설(1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위 춘광사설
- 97년, 홍콩
감독 : 왕가위 주연 : 장국영, 양조위

왕가위가 ‘춘광사설’에 와서야 그렸던 것, 그것은 ‘둘’이라는 것이다. ‘아비정전’ 이후, 왕가위 세상의 주인공들은 항상 ‘군상극(群像劇)’을 연기했다. (데뷔작 열혈남아는 개성이 미분화된 장르 무비라서 여기서는 예외로 한다.) 다섯 명의 생각이 하나씩 어긋나면서 헛도는 ‘아비정전’, 두 쌍의 남녀가 맺어지는 순간보다는 어긋나는 것에 의미를 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 그렇게 ‘동사서독’에 이르면 군상은 결국 스토리를 파탄시키는 카오스의 요인이 된다.

어째서 이야기의 무대가 홍콩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나라여야만 했는가? 왜 남성간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전부 이 ‘춘광사설’을 오직 ‘둘’만의 이야기로 하기 위한 장치였다. 국적도 성도 두 가지로만 분리된 두 사람, 영화 전편에 흐르는 탱고마저 두 사람을 관능 안에 가두는 소도구로만 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보영과 아휘의 이야기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과의 사소한 만남의 장면도 없이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의 러브신으로 시작해 서로 상처만 주고받는 서투른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왕가위 특유의 영상리듬은 깨지고 대신에 평범한 감정이 잉태되었다. ‘시간이 조각난 거리’ 홍콩을 혼자서 방황하고 있는 연인들이 손에 넣은 최초의 타인, 최초의 사랑 ‘춘광사설 happy together’, 이것이 감동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LESLIE CHEUNG

원문 : Shino Kokawa



데뷔이후 20년 이상 아시아의 톱스타로 군림하고 ‘선택된 자’로서의 화려한 인생을 마친 사람은 상당히 드물다. 돌연한 자살로부터 1년 반, 장국영을 잃어버린 홍콩 영화계는 아직도 여전히 화려한 불꽃이 소멸된 겨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태어난 아시아의 예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고,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한순간까지도 빛나던 수퍼스타, 장국영.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만일 장국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었던 ‘아시아’는 너무나 협소해서 판에 박은 기호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쿵푸도 쌍권총도 없는 홍콩영화의 재미에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장국영이었다. 중국영화의 딱딱한 문예이미지를 풀어준 것도 장국영이었다. 아시아의 엔터테인먼트가 갖고 있는 관능과 화려함으로 세계를 매혹시킨 것도 무대에 선 장국영, 그 사람이었다. 장국영만큼 아시아영화의 본질을, 아시아의 체온과 습도를 훌륭하게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는 그런 ‘장국영의 신화’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1956년, 장국영의 탄생. 그 ‘신화’ 전야의 풍경



장국영은 1956년 9월 12일 10형제 중 막내로 홍콩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력을 가진 테일러로서 케리 그란트, 알프레드 히치콕 등 여러 유명 인들의 옷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코스모폴리탄적인 홍콩의 전형적 가정환경이었지만 양친은 모두 바빠서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페닌슐라 호텔에 별채를 갖고 거기서 일을 하며 알게 된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장국영은 회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찍이 화려한 쇼 비즈니스 세계의 이면, ‘고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13세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간 장국영은 사춘기를 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부친의 병으로 유학도중 귀국하게 되고 홍콩에서 가수 데뷔를 하게 된다. 1977년의 일이었다. 이 때부터 장국영의 25년에 이른 연예생활이 시작되었지만 데뷔이후 몇 년간은 어디까지나 팝 가수, 아이돌 가수의 위치에 만족해야 했다. 가수 장국영이 비상하게 된 최초의 히트 싱글은 Kikkawa Koji의 ‘monica를 번안한 것이었다. 이런 장국영에게도 홍콩영화의 황금시대, 80년대라는 전기가 찾아왔다.

사실, 장국영만큼 홍콩 영화 역사의 분기점을 제대로 채색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 최초의 터닝포인트는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웅본색’(86년)이었다. ‘영웅본색’은 80년대를 석권한 이른바 ‘홍콩 느와르’의 원천이었고, 액션 영화의 스타일을 밑바닥부터 완전히 바꾼 영화로 오우삼과 주윤발 콤비를 헐리우드에 보낸 계기가 된 영화이기도 했다. 장국영 역시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 후 20여년간 이어지는 ‘신화’에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 다음해 빅 히트를 기록한 ‘천녀유혼’의 주연까지 이 두 작품으로 장국영은 성룡에 이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일본에 알려진 홍콩의 스타가 되었다.

이런 장국영이 한번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89년,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해이다.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는 동안에 은퇴하고 싶다’라고 말한 자못 장국영다운 은퇴의 변은 그가 팬이었던 야마구찌모모에(가장 정점에서 돌연 은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의 은퇴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지만, 어쨌든 이런 일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 왕가위와의 만남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1990년대 아시아 영화의 전환기, 거기에는 언제나 장국영이 있었다



90년대 홍콩영화의 개막은 왕가위와 장국영의 영화 ‘아비정전’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왕가위에게 있어서도 장국영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걸작은 이 ‘아비정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호감을 배제하더라도 이 작품이 당시 홍콩영화계에 준 영향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비정전’은 장국영을 필두로 유덕화, 양조위, 장만옥, 장학우, 유가령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총집결한 전형적인 스타무비면서 동시에 기존의 스타무비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프로그램 무비가 주류를 이룬 그때까지의 홍콩영화의 룰을 무시한, 스타를 총출연시킨 홍콩 최초의 본격적인 아트무비였다. 시간과 장소를 교착시키고 스타들을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한, 왕가위는 서서히 전형적인 홍콩 영화의 틀을 와해시켜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국영이었다. 쾌락과 허무가 뒤섞인 청춘을 어찌할 줄 모르면서 사랑을 거절하고 그러면서도 갑절로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 시간을 증오하듯 살면서도 ‘단 한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던 청년. 장국영은 마치 이 뒤섞인 성격의 유디를 연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았다. 그가 트렁크에 런닝을 입은 모습으로 거울을 보며 맘보를 추는 신이 있다. 트렁크에 런닝차림이라니... 그런데 그는 거기에 도취되어 춤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신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아름다움’은 리버 피닉스나 죠니 뎁과는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그것이다. 이런 모던한 방식이 있다니! 홍콩 영화에 대한 원래의 선입관을 완전히 뒤엎은 신선함은 뒤이어 나온 ’중경삼림‘과 ’춘광사설‘로 세계를 열광시키게 되는데(때로는 ’스타일리쉬‘라고 단순화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왕가위의 재능의 발로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보여주는 맘보 신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 다른 장국영의 대표작 ‘패왕별희’는 그를 한층 더 비상하게 해 준 작품이다. 그가 첸 카이거와 함께 얻은 것은 이미 홍콩이라는 틀을 넘어서 아시아의 영화에 대한 전 세계로부터의 찬사였다. 이것은 ‘구로자와 아키라’ 이후 최고의 쾌거이며 중국, 대만, 홍콩이라는 ’대중화권‘을 아우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더욱더 엄청난 스케일의 도약이 된 것이다. 또한 이는 장국영 개인으로서도 그 자신의 사명감을 ‘아시아’에로 명확히 하는 전기가 되었다. 덧붙여서 그는 조부가 문화대혁명 때 박해받다 죽임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을 무대로 한 이 장대한 역사의 비애를 연기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 두 편의 대표작으로 장국영은 최고의 배우가 된 것이다. 찰나의 삶, 격렬한 사랑, 결국에는 비극을 맞이하는 것, 즉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1997년 춘광사설. 홍콩영화의 절정, 홍콩의 쇠퇴.



일전의 은퇴 선언이 거짓인양 그 이후 장국영의 정력적인 배우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중에 수많은 뛰어난 작품과 더불어 그것을 상회하는 수많은 졸작도 있었다.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장국영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가 영화계 전체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94년 발표된 ‘금지옥엽’은 그 중에서도 단연 획기적이었다. 금지옥엽의 감독, 진가신을 왕가위와 나란히 90년대 홍콩영화계의 스타 감독으로 올라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장국영이었다. 또한 이익을 제일로 생각하는 홍콩영화계에서 경시당한 ‘양심적문예영상작가’인 장지량 감독의 ‘유성어’의 프로듀서를 맡아 스스로 단 1달러의 개런티만을 받고 주연을 맡는 등 90년대 후반 이후의 장국영은 스스로의 커리어를 구축하는 동시에 좀더 큰 관점에서 홍콩영화에의 공헌을 생각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장국영에게는 아시아의 긍지가 있었다. ‘아시아의 재능있는 감독과 같이 일하고 싶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헐리우드가 쿵푸나 액션이외의 홍콩 영화인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욕이며 내가 해야 할 일 따윈 그곳에 없다’라고 일갈했다. 성룡, 주윤발이라는 할리우드로 거점을 옮긴 대 스타와 양조위, 장만옥과 같은 뉴웨이브 배우들의 중간 지점에 서 있었던 장국영은 헐리우드를 배우의 최고 도달점으로 보지 않고, 아시아 내부로부터 세계를 응시한 배우로서의 정체성를 확립한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장국영은 주윤발처럼 완벽한 ‘명성의 표본’도 아니고 양조위처럼 한참의 시간적 간격 후에도 ‘바로 그 사람’으로 돌아오는, 몰입형의 배우도 아니다. 계속 젊음을 간직한 스타로서, 편안하고 캐쥬얼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극도로 증오한 진정한 최후의 ‘대스타’였다. 그는 합리와 비합리, 완벽주의와 감상주의, 거만 속의 섬세함, 서비스 정신이 왕성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차가움을 함께 갖고 있었다. 장국영은 이런 양면성을 항상 내면에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를 연기하지 않고 단지 장국영으로 있어도 충분히 드라마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국영은 자신의 팬 이상으로 자신의 이런 모습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은 ‘보통의 남자’와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춘광사설’은 이런 점에서 장국영과 왕가위의 행복한 공동작업의 ‘종언’을 고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연기한 보영이 갖고 있는 중성적인 에로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잔혹성이 교차하는 성질은 장국영이라는 사람 자체의 ‘캐리커쳐’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게 한다. 양조위가 연기한 아휘가 서술자의 역을 맡은 이 작품은 원래의 의미, 아휘의 시각을 넘어서서 보영 즉, 장국영이라는 매력적인 괴물을 묘사한 이야기인 것이다. ‘춘광사설’ 이후 인터뷰에서 장국영은 ‘더 이상 왕가위 감독과 일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양조위는 왕가위라는 ‘독재자’에게 차라리 스스로 나아가 몸을 바쳐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감각에 취하는 것이 가능한 배우이지만 장국영은 물론, 그렇지 않았다. 춘광사설이 공개된 1997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그리고 홍콩영화는 조용히 그 쇠퇴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3년 4월1일, 장국영은 ‘전설’이 된 것인가



90년대 후반 이후 장국영은 배우보다는 오히려 가수 활동에 비중을 둔 것 같다. 여러 차례에 걸친 월드투어는 모두 그 해의 화제 거리가 되었으며, 치밀하고 뛰어난 연출로 빨간 하이힐을 신기도 하고, 허리까지 오는 장발에 고띠에 의상으로 몸을 감싸기도 했으며, 관중을 철저히 유혹하고 매혹시켰다. 장국영의 무대는 늘 예능의 허식을 온전히 간파하고 그 위에 ’존재한다‘는 각오와 으름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으로는 도저히 소화가 안 되는 화려함(華)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것이다. 철저하게 자유였다. 그러나 이런 황홀했던 장국영의 기억을 되돌아보다, 작년 4월 그의 죽음에 이르게 되면 바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 버린다.

장국영은 꽃 중에서 난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난이 꽃 중에서 생명이 제일 길기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답게 웃었지만 장국영의 팬에 있어서, 그리고 아시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국영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화려함(華)인 것이다. 이제는 금기라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힘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전설’이라 불리는 최후의 스타인 것이다. 그리울 만큼 가까운 이국에 살면서 애절할 정도로 먼 타인, 은막에서 무대에서 존재했던 장국영, 이 아시아의 대스타는 우리를 매혹시키고 어느 한 순간 바람처럼 떠나버려 결국 영원한 짝사랑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 special thanks to
번역에는 아유님, 내용정리에는 나는자유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좋은 글을 소개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