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board.jpg

 
작성일 : 03-04-19 21:44
哥哥 지인들의 추모글과 인터뷰 5 - 장만령 편
 글쓴이 : 12956
조회 : 7,832  
ET衛視周刊

가슴이 아프다.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글 : 장만령(《패왕별희》의 경극장면을 위해 哥哥에게 경극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4월 1일과 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다. 이건 잘못된 보도일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宋小川(《패왕별희》경극분장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실임을 알았다.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그날 밤, 난 어떻게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고, 꿈에서 국영을 보았다. 그는 나에게 떠난다고 일러줬다. 북경에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꿈에서 그 떠나는 사람을 보지 못하면, 그가 편안히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난 꿈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랬다. 그가 편안하게 떠나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맘이 놓이질 않았다. 그는 아직도 편히 쉬지 못하고 이곳을 떠돌아 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영은 아주 남자다운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런 길을 선택한데에는 필시 무슨 풀지 못한 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24층,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당신때문에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다. 이렇게도 좋은 사람이 떠나다니, 정말 안타깝다! 그가 이렇게 떠나다니, 이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가 왜 이렇게 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38.9도와 무대걸음



나와 내 남편 史燕生은 1993년 《패왕별희》를 촬영할 때, 장국영을 알게 됐다. 그 때 우리는 그의 경극 지도선생님이었다. 첫날, 우리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몸을 풀고 있던 중이었는데, 내 남편이 그에게 "Mr, 장,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갛게 달아올랐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연습 중이라 그럽니다."라고 대답했었다.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에 열이 38.9도까지 올라갔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계속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영은 그전까지 경극을 해본적이 전혀 없었는데, 그의 이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천재였다.

경극을 배우는 1개월동안 그는 매일 오전 촬영장에서 4시간동안 연습하고, 일을 다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서까지 연습을 했는데, 심지어는 식사할 때도 경극동작을 생각하고 있었다. 식사도중에 뭔가가 생각이 나면, 그는 조용히 손짓으로 흉내내며, "장선생님, 제 동작 좀 봐주세요. 이렇게 하면 맞나요?"라고 물었다. 그가 경극을 배울 때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도 같았는데, 칭찬을 받으면 너무 기뻐했다. 난 그의 동작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면, 그의 잘못을 꾸짖기도 했는데, 그는 나에게 "장선생님, 오늘은 제가 잘 못하지만, 내일 한번 지켜보세요. 내일은 분명히 잘 할 수 있을 거에요."라고 했고, 이튿날 정말로 그는 완벽하게 해냈다. 국영은 예술에 관해서는 대충하는 법이 없었고, 우희 배역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심지어는 걸을 때에도 평소걸음이 아닌 무대식 걸음으로 다녔는데, 그의 이런 모습이 집착이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좋지만, 어쨌든 난 그처럼 이렇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질 못했다.

6시간과 3장의 종이



우리들은 국영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그가 북경에 올 때면 아무리 바빠도 우리를 보러왔다. 그는 아무데나 앉아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식사를 하러 가기도 했는데, 그와의 시간은 즐거웠고, 그에게서 친근함이 물씬 배어나왔다. 매년 설날에는 전화로 안부인사를 나눴는데, 국영은 사랑이 필요하고, 따뜻함이 필요하고, 진실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들 앞에서 그는 특히 천진난만한 아이와도 같았다. 우리집에 오면 그는 바닥에 앉아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그는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다.

그가 새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난 그에게 무슨 선물을 해 줄까?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정 선물을 보내고 싶으면 실내화를 보내달라고 했다. 홍콩에서는 실내화를 선물하면 집안의 나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小川은 상점에 가서 가죽실내화를 사 그에게 선물했다. 97년에 그가 홍콩에서 콘서트를 할 때, 우리가족모두는 그의 초대를 받았다. 그는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고, 호텔로 돌아갈 때는, 그가 자신의 차로 우리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서 작별인사를 했다.

국영과는 겨우 1달여 가량 일로 만났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끝난 상황인데다가, 난 경극을 하고 나이까지 많은 사람인데, 그가 나에게 뭘 바랬겠는가? 우리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가…

내가 그에 대해 가장 잊을 수 없는 점은 그의 사람됨이다. 1998년, 내 남편은 암에 걸렸다. 국영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보기위해 북경에 왔다. 그 때, 내 남편은 집에서 링겔을 맞고 있었는데, 국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史선생님이라 부르며 그를 껴안았다. 사실, 내 남편은 아주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눈물을 보였다. 난 국영의 두 눈도 빨갛게 충혈된 것을 보았는데, 난 그가 史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史선생님, 괜찮으실거에요."라고 말했다. 당시에 내 남편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는 "史선생님, 잘 드셔야 돼요. 제가 이렇게 많이 먹는 것 처럼 잘 드셔야 돼요. 뭐 드시고 싶은신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라면서 그에게 식사를 권유했다. 그런 후에, 그는 내 남편 곁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구 거기에 앉아서 그의 손을 잡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쭉 그의 곁에 있었다. 후에, 小川이 알려줬는데 그는 집에서 나간 후에 주머니에서 3장의 종이를 꺼내 길에서 태웠다고 알려줬다. 일종의 액땜이었는데, 홍콩의 풍습에 따라, 그 해는 그가 병문안을 가면 좋지 않은 해였는데, 그는 우리가 걱정할까봐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우리를 보러 와 준 것이었다.

아...지금은 그 두 사람 다 떠났구나, 그 두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국영에게 史선생님이 그곳에서 당신을 잘 돌봐줄 것이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빌었다.

8명의 아이와 하나의 "正(올바름)"자



홍콩에 갔을 때 한번은 임청하가 그녀의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장선생님, 이 연예계에서 국영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아요."라고 말했는데, 임청하도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시피, 나도 직접 그런걸 느꼈다. 국영은 정말 사랑이 충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노인, 친구,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했는데, 우리들이 같이 식사하러 가서 식당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사진을 찍자고 요청을 하면, 그는 그 사람이 요리사이던지 웨이터이던지 상관없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주었다. 1997년 홍콩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 그는 《패왕별희》의 주제곡을 부르기 위해, 북경경극학교에서 8명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무대에 올렸는데, 성공적이었다. 그 후에 북경에 왔을 때 이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직접 와서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정말, 그는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난 한 사람이 예술에서든 사람을 위함에 있어서든, 모두 "正(올바름)"자 하나로 대표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명인이자 스타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좋아했다. 그는 떠났지만, 우리들은 더욱더 그를 그리워하고 추모한다. 그렇다면, 그의 어떠한 것들을 추모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의 예술과 인품을 추모해야 한다. 이것저것 추측해서 쓰인 기사들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난 우리들이 그의 예술이 현대사회에 끼친 공헌을 깨닫고, 그가 예술적으로 남겨놓은 것들을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고인에게,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추모일 것이다.

* 이 글은 이곳에서만 감상해주세요. 운영자의 동의없이 다른곳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